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아 칼라스 (문단 편집) === 1950년대 전반 === 1950년 4월 12일 오페라 가수들의 이상향이자 가장 가혹한 비평 무대로 손꼽히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가극장에 [[주세페 베르디|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의 아이다 역으로 데뷔하였는데, 이 공연은 당시 라 스칼라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던 (그러나 곧 칼라스에 의해 밀려나게 되는) 레나타 테발디의 대역으로 출연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주역으로 정식 계약한 라 스칼라 데뷔는 1951년 12월 7일 역시 베르디의 오페라인 '시칠리아의 저녁 기도'의 엘레나 공주 역으로 이루어졌고, 곧 이 극장의 레귤러 가수가 되었다. 칼라스가 이탈리아에서 연이어 거둔 성공은 다른 나라들의 오페라극장과 오페라단에도 신속하게 전해졌는데, 1952년 여름 멕시코 시티 극장에서 몇몇 공연을 하였고 이때 녹음된 음원들이 열악한 음질에도 불구하고 당시 목소리의 최고 전성기였던 그녀의 목소리를 남겨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52년 말 그녀는 HMV(이후 [[EMI]])의 명 프로듀서였던 월터 레그에게도 발탁되었고, 본격적인 오페라 전곡 녹음도 시작했다. 또 1952년 11월 8일 런던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극장에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의 타이틀 롤로 데뷔하여 절찬을 받았다. 이후 코벤트 가든에서 '아이다'의 타이틀 롤, '일 트로바토레'의 레오노라 역,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역, '메데아'의 타이틀 롤, '토스카'의 타이틀 롤로 출연하였으며, 그녀의 마지막 오페라 무대도 1965년 7월 5일 코벤트 가든에서의 '토스카' 공연이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호평에도 불구하고 칼라스는 자신의 뚱뚱한 몸 때문에 고민했다. 20대 초반에 95kg에 달하던 몸무게를 80kg대로 다이어트해서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활동해 왔다. 남편인 메네기니나 그의 팬들은 칼라스의 몸집에 훨씬 관대했지만, 칼라스는 노래 뿐 아니라 연기하는 배역과 일체화되기 위해서는 더 날씬한 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1953년 영화 [[로마의 휴일]]을 보고 감명받은 칼라스는 당시 사실상 연인으로 지냈던 연출가이자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에게 자기가 [[오드리 헵번]]처럼 다이어트를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고 비스콘티가 그러면 진정한 트라비아타가 될 것이라고 말하자 곧바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1953년 봄부터 1954년 초까지 약 11개월간 칼라스는 30kg 이상을 감량했고, 하루아침에 '북경오리에서 백조로 환골탈태한' 몸매를 얻게 되었다. 다만 그녀는 10대 시절부터 육중한 체구를 지탱하느라 발목이 좋지 않았는데, 다이어트를 하고 나서도 발목이 여전히 굵었다. 그래서 발목이 드러나는 치마를 기피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실제로 그녀의 무대의상은 거의 대부분 발목이 드러나지 않는 드레스였으며, 오나시스와 쇼핑 등 일상 생활 중에 파파라치들에게 찍힌 사진을 보면 발목이 상당히 굵은 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54년에는 [[시카고]]의 리릭 오페라단에서 첫 미국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는데, 이 오페라 공연 뒤 갑자기 사복경찰들이 대기실로 찾아와, 미국 공연기획자인 에디 바가로지가 칼라스를 계약 위반으로 고소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고소 소식을 듣고 칼라스가 고성과 욕설을 퍼붓는 모습이 기자들의 카메라에 찍혔는데, 이 사진은 이후에도 칼라스 스캔들 관련 기사에 종종 등장하며 '성질 더러운 프리마돈나'라는 이미지 형성에 한몫했다. [[파일:attachment/mariacallasinrage.jpg]]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